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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시앙스앙퓌즈'라는 사이트에 올렸던 글을 다듬고 조금 고쳐 충북세계시민교육선도교사 연수에서 강의했던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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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가 쓴 에밀18세기 말 프랑스 교육을 뿌리째 흔들었다. 당대 교육은 교회 교리가 절대적 영향을 미쳤지만1), 루소는 그 교리와 반대되는 인간 이해와 교육 방법을 설파했다. 그 때문에 그는 평생 괴로웠으나 그 책은 지금까지도 읽히고 있다. 그 무엇이 에밀을 우리 손에 들게 하는 것일까? 단순히 당대 종교나 권력에 대항했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 책의 의미를 축소시키는 것이라고 보기에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당대 교육은 교회의 영향⑴ 아래 있었으나 루소는 교리의 핵심, 원죄를 부정했다. , 인간 본성인 자기애(amour de soi-même)2)를 교회는 악하다고 했지만 그는 아니라고 했다. ‘자기애'는 선악과 무관하며 오히려 도덕적, 이타적 삶을 추동케 하는 힘이라고 했다. 다만, 그 힘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하여 자기주장(amour propre)3)으로 변질되면 개인은 욕망에 사로잡혀 욕심 가득한 사회를 만들게 된다고 했다.4) 원죄가 문제가 아니라 잘못 형성된 인간 본성이 문제라는 것이다.

, 그가 말한 교육은 기독교를 부정하는 교육이 아니었다.5) 그보다는 구체제 내 제 욕심만 채우는 사제와 귀족들, 부도덕한 그들을 선망하는 부르주아지나 일부 농민들을 보며 이 사회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고, 이를 타계할 방법이 원죄'에 근간한 교육에 있지 않음을 말했다. 루소는 인간의 본성을 바르게 형성하는 기술(l'art de former des hommes)'로서의 교육을 받게 하자는 것이었다.6)

하지만 그의 의도는 교회와 권력자들에게 왜곡되고 배척당했다.7) 당대 교회와 권력자들은 루소가 인간의 원죄를 부정하고 신이 허락한 인간의 문명과 사회를 비난했다며 오해8)했고, 그를 당대 사회에 위험한 인물로 몰아세웠다. ‘에밀'은 파리, 제네바에서 뺏기고 불태워졌다. 루소는 늘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프러시아, 영국, 프랑스를 떠돌았고 결국, 1778년 신경쇠약과 질병에 시달리다 생을 마감하였다.

그가 죽고 11년째 되던 해,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터졌다. 구체제(L'ancien Régime) 아래 신음하던 농민, 국고의 상당 부분을 책임지면서도 신분적 한계 때문에 정치적 참정권을 보장받지 못했던 부르주아지가 분노하여 당대 기득권층을 몰아냈다.

루소가 바랐던 세상이 열렸을까? 거기에 어울리는 교육이 시작되었을까? 교육학자 올리비에 르불(Olivier Reboul)은 혁명 이후 교육을 이렇게 말한다.

19세기 프랑스어에서 교육은 전적으로 예의범절을 가리켰다. 그것은 당시 지배 계층의 규범을 내면화하는 것이었고, 예의범절은 계층의 표상과 가치였기에 그 계급에 편입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 교육이란 철저한 자기관리 능력함양을 뜻했다. , ‘교육받은 사람이란 때와 장소에 따라 적절히 처신하고 평정심을 잃지 않는 이, ‘자기 관리를 잘 하는 사람이란 말이었다(Reboul, 15).

당대 사회와 교육은 분명 구체제와 거리를 두려 했지만, 그 때 교육이 루소의 그것과 가깝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국민 교육 개혁안9)이 시행되었지만, 어린이를 도덕적 주체로 성장케 하여 이상적인 국가를 이루는 근간이 되게 하는 교육은 시행되지 못했다. 오히려 혁명 후 혼란은 사람들에게 좀 더 유리한 생존 조건을 확보하려는 노력만 경주하게 했고 교육은 이를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또 다른 생존 경쟁만 남았고 교육은 그것에 이용되었을 뿐이다.

루소가 말한, 인간 본성을 도덕적으로 형성하여 이상적인 사회(국가)를 세워가는 교육은 그렇게 이상적인 얘기로 끝난 것일까? 아니라고 본다. 지금도 에밀은 읽히고 있다. 뺏기고 불탄 책이, 실패했던 교육적 구상이 지금도 이렇게 회자되는 까닭은 아마도 그가 교육을 통해 꿈꾸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우리는 세계시민교육으로 자국의 이익과 경쟁력 향상이라는 목적을 넘어 평화와 인류 공영의 이상을 꿈꾼다. 여기서 다시 교육의 본질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우리의 행위를 루소가 에밀을 썼듯 우리의 내일을 쓰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각주

1.좀 더 정확히 말하면 16세기 창설되고, 이후 정치 경제에 영향력을 행사한 '예수회'의 영향력.

2.amour de soi로 줄여서 쓰기도 하고, ‘자존감이라 번역되기도 한다(Boyd, 114쪽 각주). , 루소는 자기애를 인간이 타고난 유일한 정념이라고 했다(Boyd, 288).

3.자기주장, 허영, 이기심, 자기갈등, 자기본위, 자기집착으로 번역되기도 했다(Boyd, 114). 이 정념은 내 필요가 아닌 타인을 의식하는 데 매여 늘 자기를 우선 시 하고, 자기가 가진 것으로 더 돋보이고자 애쓰게 하기에 불행과 부도덕한 삶을 이끈다.

4.이 부분에 대한 부가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자기주장은 그렇다고 무조건 나쁘다고 보면 안 된다. 왜냐하면, 자기주장 또한 자기애의 다른 모습이며, 자기주장이 선하게 인도되었을 땐 자기과시가 아닌 "명예로운 행위"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5.그는 기독교인으로 살았다. , 그는 기독교 교리에 대한, 특히 "원죄"에 대한 깊은 사유를 남겼다. 다만, 한국에선 이단 시 하는 "이원론적 신관"을 보인다.

6.프랑스어 PDF, 5.

7.에밀이 출판된 후 파리 대주교가 각 교회에 보낸 교서에 보면 "인간은 누구나 가증스러운 성향에 의해서 자신이 타락의 길로 빠져들고 있음을 느낍니다. ... 이 가증스러운 성향에 투쟁하려면 하나님 은총 가운데, '지혜와 인덕을 겸비한' 엄한 선생에게서 지도 받아야 합니다."라고 주장하며 루소가 쓴 에밀은 이런 점을 부정하였다며 비판했다(Boyd, 289).

8.루소는 "에밀"이 문명을 부정하거나, 사회를 무너뜨리고자 쓴 게 아님을 파리 대주교나 다른 학자들에게 적극적으로 밝혔으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음.

9.이와 관련해 프랑스 대혁명 전후로 발표된 여러 교육개혁 안을 봐야 한다. 프랑스 대혁명 전에 발표된 것으론 '생 삐에르(Saint Pierre)가 낸 '교육개혁안'과 루이르네 드 라 샬로테(Louis-Rene de la Chalotais)가 낸 '국민 교육론'을 들 수 있다. 혁명 이후 개혁안은 우리나라 교육계에도 잘 알려진 '콩도르세(Nicolas de Condorcet)'의 '공교육에 관한 다섯 가지 의견'(Cinq Mémoires sur l’instruction publique)이 있다.

참고 문헌

1. Rousseau, Émile ou de l'éducation
:프랑스어판 Jean-Marie Tremblay 편집 PDF. 5.
:한글판, 민희식 옮김, 육문사, 2015년 개정판.

2.William Boyd, 김안중, 박주병 옮김, 루소의 교육이론, 교육과학사.

3.ColineJones, 방문숙, 이호영 옮김,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케임브리지 프랑스사, 시공사. 197-213.

4.곽준혁, 정치철학, 민음사. 209-219.

5.OlivierReboul, La philosophie de l’éducation, puf.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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